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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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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백범의 소망, "아름다운 대한"
작성자 박지원(고양국제고) 개최일 2024-11-29 조회 22767

 

백범의 소망, "아름다운 대한"


고양국제고

1학년 8반 박지원

 

최근 '건국절', '뉴라이트 사관'과 더불어 김구를 '테러리스트'라 규정한 책이 출판되며 역사를 배우는 것, 수많은 독립 운동가 분들을 기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긴다. 앞선 망언에 자신 있게 근거를 들어 반박하고자 "내가 김구 선생님에 대해 얼마나 잘 알고 있는가?"하고 자문했다. 곧이어 나는 독립 운동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 한인애국단, 나의 소원 등 간략한 몇 단어로 그를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김구 선생님의 독립 운동에 대한 헌신과 자주독립에 관한 바람, 한평생 수호해 온 가치관을 떠올려 보자면, 그는 절대 몇 단어로 정의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늘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김구를 꼽으면서도 몇 마디 단어로 밖에 그를 정의하지 못하는 내가 무척 부끄러웠다. 그렇기에 <백범일지>를 통해 백범 김구의 삶과 가치관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그가 꿈꿨던 진정한 의미의 "자주독립", 그가 추구했던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이뤄나가는 방안을 고찰해보고 싶었다.

 

<백범일지> 속 김구는 내가 단순히 정의했던 몇 단어로 결코 표현될 수 없었다. 장난기 가득했던 유년 시절 "김창암"의 모습은 나의 두 눈을 의심케 했고, 글공부에 대한 열정, 과거에 응시하며 깨달은 사회의 부조리, 그 대안으로 시작한 관상과 풍수지리 공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겠다"는 다짐은 너무나 생생했다. 하지만 이처럼 저자의 말부터 나의 소원까지 책장을 넘길 때마다 감출 수 없었던 설렘, 생소한 한자 어휘와 지명,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성함,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이름을 찾으며 교차했던 감정, 김구를 온전히 이해하고 싶어 두 번, 세 번 책을 반복해 읽는 과정에서 적어두었던 생각을 두서없이 적다 보면, 본디 품었던 독서의 목적을 흐릴지 모른다. 결국 <백범일지>를 통해 배워야 하는 것은 김구의 일생과 가치관에 대해 온고지신의 태도를 갖춰 오늘날을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따라서 나는 "의기남아, 김구"에게 있었던 인생의 전환점 4가지, 내게 더욱 큰 울림을 주었던 몇 가지 내용을 덧붙여 진정한 의미의 "자주 독립"과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대한민국"을 이야기 하고자 한다.

 

[첫 번째 전환점, 과거 낙방과 동학 활동]

 

"이번 과거 시험장에서 이런 저런 꼴을 보니, 제가 어떻게든 공부를 성취하고 입신양명을 해서 강가 이가의 압제에서 벗어나려고 했는데 유일한 진로라는 과장의 악폐가 그러했습니다. 그러니 제가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는 강, 이씨를 제압하더라도 그들에게는 돈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겠습니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되겠는데 집안이 이같이 적빈이니 이제 서당 공부는 그만 두겠습니다."

 

늙은 선비들의 걸과, 돈만 많으면 과거도 할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으며 아무리 시를 짓고 부를 지어 과문육체에 능하더라도, 과거 시험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한 현실 속에서 김창암은 과거의 꿈을 접게 된다. 조선 사회 전반의 폐해는 과거 시험장에서도 가감없이 드러난다. 김창암은 관상을 공부해보지만, 이는 그의 비관을 더할 뿐이다. 결국 그는 "마음이 좋은 사람"이 되고자 결심한다. <백범일지>를 접하기 전,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 "그분들은 유년 시절부터 뭔가 범상치 않고, 일말의 고민 없이 큰 뜻을 품지 않으셨을까?" 안일한 생각이었다. 김구 선생님은 사회의 부조리 속에서 이룰 수 없는 꿈인 과거 급제를 포기하고, 끝없는 비관의 순환에 빠지지 않으셨다. 관상 공부에 도전했고, 본인의 상이 좋지 않음을 알게 된 후에도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는 구절처럼 마음 좋은 사람이 되고자 고민한다. 우리는 절망적인 일을 겪은 후엔 "슬럼프"를 내세워 당장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청년 김창암처럼 어려움을 직면하고, 포기할 줄 아는 용기를 알고, 도전을 멈추지 않으며, 긍정적으로 사고한다면 새로운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여 더 성숙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창암은 차별대우를 철폐한다는 말에 감격하며 동학에 입도해 "애기접주 김창수"로 성장하여 더 큰 세상을 배워나간다. 뿐만 아니라 동학을 그만두고 안 진사와 교류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고능선 선생을 통해 그는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게 된다. 이는 김구의 생애에서 이어지는 다채로운 경험과 더불어 "문화의 중요성"을 그가 인식하게 되는 첫 번째 계기라 생각된다.

 

[두 번째 전환점, 치하포 의거]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식으로 내가 죽을 날이 올 때까지 글이나 실컷 보겠다고 작정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신서적을 보고 새로 깨닫게 되는 것은 고 선생이 전날 조상에 제사를 지낼 때 유세차 영력 이백 몇 해라고 축문을 쓴 것이나 안진사가 양학을 한다고 하여 절교한 것이 그다지 현명해 보이지 않는다. 의리는 학자에게 배우고 일체의 문화와 제도는 세계 각국에서 채택하여 적용하면 나라에 복이며 이익이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1895년의 조선은 청일전쟁, 을미개혁의 일환인 단발령, 을미사변으로 혼란스러웠다. 1896년, 가변적인 국내 상황에 고향으로 돌아가려 하던 중 김창수는 치하포의 여관에서 조선인 행세를 하고 있는 칼을 찬 일본인, 쓰치다 조스케를 마주한다. 김창수는 그 일본인이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 또는 그 공범이라 판단하여, "국모보수" 명분 하에 그를 살해하게 된다. 치하포 사건과 관련하여 여러 다양한 견해가 있지만, 나는 그로 인한 김창수의 사상 변화에 주목하고 싶다. 인천 감옥에 이감되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행동을 회피하거나 숨지 않는다. 사건 발생 당시에도 비겁하게 도주하지 않았던 김창수는, 재판을 받으면서도 도리어 고관대신들의 무능과 일본의 죄악을 당당히 언급할 뿐이다. 이러한 점에 있어 치하포 사건은 김구의 항일 투쟁 과정에 있어 그가 초심을 잃지 않을 수 있었던, 그 구심점 사건이라 판단된다. 또한 김창수는 감옥에서 다양한 신서적을 접하며 그동안 가졌던 배외 사상에서 탈피하게 된다. 세계 각국의 문화와 제도를 수용하는 것이 나라에 도리어 이득이 된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는 세상을 배워나간다. 뿐만 아니라 김창수는 함께 복역하는 징역수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교육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하게 된다. 이러한 일들이 후일 김구가 애국 계몽 운동에 참여하고, "문화의 힘"을 거듭 강조하는 사상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판단된다.

 

[세 번째 전환점, 안악 사건과 白凡 金九]

 

"결심의 표로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고 고쳐서 동지들에게 공포하였다. '龜'를 '九'로 고친 것은 왜의 민적에서 벗어남이요, '연하(蓮下)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몇 년간 연구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우리나라의 하등 사회 곧 백정 범부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 나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그런 바람을 가지자는 것이다.⋯ 우리도 어느 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나는 그 집의 뜰도 쓸고 창문도 잘 닦는 일을 해 보고 죽게 하여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하였다."

 

탈옥하여 유랑하다 승려의 삶을 살기도 하는 김창수는 애국 계몽 운동에 헌신한다. 그는 교육 분야는 물론 비밀 결사단체 신민회에서도 활동하며, 독립을 향한 강한 열망을 보여준다. 얼마 후 안명근 주도로 시도되었던 안악 사건에 연루되어 김구는 세 번째로 감옥에 수감되고, 온갖 억울한 죄목 하에 17년 형을 받게 된다. 그러나 감옥에서도 그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왜놈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우리의 일시적 국운 쇠퇴이고 일본은 조선을 영구 통치할 자격이 없음이 명약관화하게 생각된다.", "오냐 나는 죽어도 왜놈에게 대하여 몽우리돌의 정신을 품겠고 살아도 몽우리돌의 책무를 다하고 말리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졌다." 앞선 두 문장을 통해 김구의 독립 의지는 명확히 드러난다. <백범일지>에는 당시 서대문 형무소에 투옥되었던 독립 투사들의 열악한 환경이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감시, 고강도의 노동, 열악한 감옥 내부 환경 속에서도 그들의 신념은 변치 않았다. 후일 메이지의 사망으로 감형이 이루어진 이후에도 각자의 방식으로 독립운동을 이어가는 독립운동가들의 모습에 존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이름과 호를 고치며 출소 이후의 삶을 그리는 김구에게 있어, 안악 사건은 그의 독립에 대한 굳은 결의를 갖게 만들었던 인생의 전환점이라 판단된다.

 

[네 번째 전환점, 이봉창, 윤봉길 의사 의거]

 

"제 나이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세를 더 산다 한들 과거 반생의 삶에서 방랑 생활을 맛본 것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이 무슨 재미가 있겠습니까.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31년 동안 육신으로는 인생 쾌락을 대강 맛 보았으니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렵니다. 그래서 우리 독립사업에 헌신하겠다는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산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이지 않습니까. 제게는 한 시간밖에 소용이 없는 물건입니다."

 

각각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의 말씀으로 유명한 구절이다. 김구는 임시 정부 경무국장으로서 정보 감찰, 경찰, 밀정 처단 등의 업무를 전담하며 독립운동에 몰두한다. 하지만, 임시정부는 "이념 대립"과 갈등의 장으로 변모하고, 개조파와 창조파로 갈라져 첨예한 논쟁을 벌인다. 결국 1920년대 후반의 임시정부는 자금난, 독립운동가들의 이탈과 수많은 밀정으로 인해 쇠락기에 들어서고 말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김구는 임시정부를 끝까지 지키며, 재건을 위해 노력한다. 이때 그는 한인애국단을 통해 판세를 역전시킬 수 있었다. 이봉창 의사는 처음에는 그 누구보다도 진정한 일본인이 되고자 하셨다. 하지만 점차 일본의 차별 대우에 분개하게 되고, 결정적으로 일왕 즉위식에서 한국어 편지를 갖고 있다는 이유로 수감 당한 후, 독립운동에 헌신할 것을 결심하게 되었다. 기존에 갖고 있던 관념에서 벗어나는 것, 마음 속에 품은 큰 뜻을 실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봉창 의사가 상해로 와 남긴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면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도모하겠다"는 말은 그의 가치관을 명확히 반영하는 동시에, 오늘날 도전을 두려워하는 현대인들에게 큰 울림을 준다고 생각한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는 표면적으로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임시정부의 재기에 있어 큰 의미를 갖는다.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지원해주는 응원과 자금은 다시 증가했고, 큰 뜻을 품은 이들도 김구를 찾아오게 된 것이다. 결국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 성공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일 수 있었다. 비록 이 의거로 인해 임시 정부는 고난의 대장정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중국 인사들의 지원은 물론, 내부의 결속력을 다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임시 정부 주석 김구 인생에 있어 또 한 번의 전환점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독립 운동가]

<백범일지>의 참된 묘미 중 하나는 김구 선생님의 서술에서 드러나는 수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아닐까 생각한다. <백범일지>를 통해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던 것을 시작으로 신민회 활동, 임시 정부 수많은 요직을 거치며 임시 정부의 통합, 조국의 광복을 위해 힘썼던 이동녕을 비롯한 비교적 이름이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들의 이름뿐만 아니라 한국광복군 최초의 여성 대원인 신정숙, 의열단, 조선민족해방연맹에서 활동하다 광복 이후 좌우 합작을 위해 힘쓰셨던 박건웅 등 수많은 익숙하지 않은 분들의 성함을 알게 되고, 그들의 헌신을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마치 시험공부하듯 고작 몇 단어로 그들을 정의 내리는 것" 대신 "그들에 대해 깊이 있게 알아보고, 일평생 독립을 위해 헌신하셨던 분들을 기억하는 태도를 함양하는 것"의 중요성을 배울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독립된 조국을 가질 수 있는 것,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상에서 살 수 있는 것은 모두 수많은 이름 모를 독립운동가들의 헌신 덕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김구가 꿈꿨던 "자주독립"]

 

""왜적이 항복한답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리틀보이와 팻맨이 떨어졌던 1945년 8월. 결국 일왕은 1945년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고 만다. 그렇다면 김구는 왜 이 소식에 절망할 수 밖에 없었을까? 한국광복군을 육성하여 자주적인 독립을 추구하던 김구에게 있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은 곧 자주독립의 실패를 의미했을 것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연합국의 일원으로 일본 제국주의를 무너뜨릴 목적하에 창설되었던 한국광복군은 그 역할을 다할 수 없었고,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각각 영향력을 미치는 사태에 이르렀다. 장기간 수립해왔던 계획에 차질이 빚어지고, 한 민족이 여러 이념하에 나뉘어 두 나라로 분단될 위기에 처해 있던 그때, 통일정부 수립을 강력히 주장하며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했던 그의 마음이 어떠하였을지 차마 짐작할 수 없다. 마치 이념으로 갈등했던 1920년대의 임시정부를 마주하는 것만 같고, 한 민족이 두 개의 국가를 수립할 것 같은 긴장감 속에서 그 역시 참담한 마음이지 않았을까 싶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나의 소원에 드러나 있듯 김구는 외세의 도움 없이 한인이 이루어내는 독립을 바랐다. 그는 한 민족의 분열 앞에서는 이념을 접어두고 대화를 시도하는 모습마저 보인다. 어쩌면 우리가 자주독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극적인 동족상잔을 경험할 수 밖에 없지 않았을까? 현 시국에서 이념에 얽매여 펼치는 첨예한 논쟁으로 미루어 본다면, 김구 선생님의 이러한 자주독립 사상은 현대인들에게 많은 깨달음을 남겨줄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대한]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을 풍족히 할만하고 우리의 강력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백범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 대한"을 꿈꿨다. 일본에 의해 35년간 식민 지배를 받았기에, 무력을 중시하실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달랐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문화의 힘"이라며 도리어 문화를 강조하실 뿐이다. 김구 선생님께서는 수십 년 전에도 문화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계셨던 것이다. 나라의 국력을 판단할 때, 경제력과 군사력을 우선시했던 내 자신이 거듭 부끄러워질 수 밖에 없었다. 현재 우리나라는 "한류"를 통해 전세계로 뻗어나가는 세계 15위의 소프트파워 강국이 되었다. 김구 선생님께서 바라셨던 그 모습을 이뤄가고 있는 것 같아 내심 기쁘다. 하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 위해선 "자유"와 "교육"이 수반되어야만 한다. 백범은 자유를, 민주주의의 이념을,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하셨다. 그리고 이를 위해선 바로 문화와 교육의 힘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다양한 문화와 교육의 힘 중에서도 특히 "역사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 오늘날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그 시대에 끊임없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하셨던 독립운동가들의 노고 덕분일 것이다. 그들을 왜곡되지 않게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은 마땅히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행해야 하는 도리가 아닐까? 뿐만 아니라 역사적 순간에서 얻는 교훈은 김구가 그토록 경계했던 독재정치를 배격하고, 역사를 상고하며 남의 나라의 좋은 것을 취하고, 내 나라의 좋은 것을 골라 우리나라의 독특한 좋은 제도를 만들어 나가는 데 밑거름이 될 것이다.

 

[독서감상문을 마무리하며]

이쯤에서 나는 자문할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우리가 오늘날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는, <백범일지>를 정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는 결국은 과거 이 땅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경험을 통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깨달음을 주는 존재가 아닐까? <백범일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었던 김구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은 작게는 삶의 지혜를, 크게는 필수불가결한 역사의 교훈을 남긴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러 차례 반복해서 읽는다면, <백범일지>의 내용을 곱씹어 본다면, 대한민국의 다사다난했던 근현대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는 것은 물론, "진정한 독립운동가 김구"를 이해하는 데 한 발짝 다가설 수 있을 것이라 장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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