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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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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백범일지, 투쟁의 삶을 그리다
작성자 이선우(고양국제고) 개최일 2022-11-25 조회 537

<백범일지, 투쟁의 삶을 그리다>

 

고양국제고등학교 

1학년 8반 이선우


대한민국 헌법에서는 우리나라의 정신과 이념을 전문에 담아 표현하였다. , 대한민국 헌법 전문이란 한국의 과거이고, 현재이자, 미래를 관통하는 가장 기초적인 규칙이자, 가치관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헌법 이념'이 담긴 전문의 시작은 다음과 같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중략)'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3.1운동의 여파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안정과 발전의 역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에 대한 투쟁'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의 대한민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이해해야만 하고, 결과적으로 임시정부를 이끌어가고, 독립을 위한 투쟁의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에 대해 알아야만 한다. 그중에서도 마지막까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기여하면서 일제강점기를 보낸 '백범 김구'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는 1919년 경무국장이라는 직책을 시작으로 임시정부 국무령, 임시정부 주석 등의 자리를 맡으며 일제강점기의 마지막 기간까지 끊임없는 투쟁의 삶을 이어 나갔다. 또한 그는 광복 이후에도 일제의 전후처리 문제에 대한 해결안과 광복 후 암살당하기 전까지의 기간에 국가와 국제적인 안정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김구의 오랜 시간 동안의 노고가 대한민국 독립운동과 안정을 만들어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그렇다면 백범은 어떤 부분에 있어 독립운동을 결심하였고, 끊임없이 투쟁의 삶을 이어왔던 것일까? 질문에 대한 가장 완벽한 답변은 '백범 김구의 삶의 행적'을 통해서 파악하고 판단할 수 있다. 백범의 삶을 담은 백범일지를 통해서 우리는 백범이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과, 이를 위해 실행한 그의 행동,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나는 백범일지를 읽으며 중요하다고 느낀 3부분과 백범의 정신이 깃든 "나의 소원"이라는 부분에 관해 설명하고, 21C 현재를 살아가는 청소년으로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지녀야 할 가치와 모습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백범일지 첫 번째, 치하포 사건과 고종의 특별 사면]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이 그다지 대단할 것은 없다. 벼랑에 내달려 잡은 손을 놓을 수 있어야 장부라 할 수 있다.'

 

소년 김창수가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로 거듭나기 위해 겪는 사건 중에서 '전환점'이라고 부를 정도의 파급력을 지닌 사건은 단연 '치하포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21세였던 1896년의 사회상은 혼돈 그 자체였다. 고종이 러시아 대사관으로 도피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조선의 왕을 보호하는 러시아''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 간의 동북아시아 패권 싸움의 장이 형성되었다. 두 외세의 격돌과 조선에 대한 간섭 확대는 자연스럽게 조선의 사회에 영향을 주었고, 혼란한 사회 속에서 '단발 정지령', '삼남 의병 봉기' 등의 정책이 시행되었다. 당시 김구는 귀향길에서 황해도 치하포를 들렀는데, 그곳에 있는 조선인으로 위장한 일본인을 보고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주동자 '미우라 고로'이거나 그의 공범이라고 판단하여 살해하였다. 김구는 현장에서 "국모인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기 위해 살해하였다"라고 이유를 밝히었고, 사건 발생 석 달 후 자택에서 체포되면서 인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해 9월 인천항재판소 판사인 이재정이 김구에게 사형 판결과 함께 고종에게 사형 집행을 주청하였으나 고종이 김구의 사형에 대해 재가를 하지 않음으로 일시적으로 사형을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1898년 감옥에서 탈출함으로 치하포 사건으로 인한 감옥 생활이 끝나게 되었다. 이 사건은 '김구'라는 인물 개인뿐만 아니라 한국사적인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먼저, 김구 개인에게는 21세의 나이에 사망하는 일을 면할 수 있었다. 고종의 형 집행 정지 명령을 통해서 김구는 21세의 나이에 형장의 이슬이 돼 사라지는 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이 그의 개인적 측면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이다. 이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김창수'(개명 전 김구의 이름)를 전국적으로 알릴 수 있었던 사건으로, 추후 독립운동의 삶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사회적, 역사적 측면에서 보았을 때는 김구가 사형당하지 않음으로써 탈옥 후에 '애국계몽운동', '신민회', '임시정부'까지 참여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의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고, 이런 다양한 활동이 이루어지고, '국모보수'를 통해서 유명해짐으로 많은 독립운동가를 만날 수 있었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는 점이 주목할만한 부분이다. 결과적으로 김구는 위 사건을 통해서 '독립운동에 대한 열망'을 점차 심화시켜나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백범일지 두 번째, 애국계몽운동과 신민회 활동]

 

'왜놈이 국권을 강탈하고 조약 체결을 강제하는데 우리 인민은 원수의 노예가 되어 살 것인가 아니면 죽을 것인가!'

 

치하포사건 이후 햇수로 9년이 지난 1905, 일제는 "을사늑약"을 통해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외국과 관련된 모든 행위에 대하여 일본의 정책과 명령에 따라 시행하였고, 결과적으로 '유명무실한 국가'가 되었다. 을사늑약에 대하여 많은 이들이 무효투쟁을 벌였고, 김구도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함으로 항거하였다. 그는 이동녕, 이준, 전덕기 등의 인물을 만나 상소문을 올리고, 가두연설을 하는 등의 방안으로 무효임을 알렸는데, 그는 위의 문장과 같이 국권 침탈의 과정이 부당하고, 불평등한 조약임을 성토하면서 이에 대한 그의 분개를 표현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강제 진압에 의해 저지되었고, 문제점들에 대해 고찰하던 중 '국민들이 지식이 없고 애국심이 박약하여 나라를 변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여 교육 사업 등의 애국 계몽 사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1907년 국권회복운동의 국내 최고조직이었던 '신민회'에 가입하며 국권 회복을 위한 투쟁을 지속하였다. 애국계몽운동 활동을 두 번째로 선정한 이유는 '자주독립 국가의 이상향'에 대한 그의 가치관이 형성되었고, 변화하였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이 기간에 교육에 힘을 기울임을 통해서 '계몽'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서 고찰하는 시간을 가질 있었고, 자주독립 국가가 형성되고 발전되기 위해 필요한 '교육''문화'에 대해 중요시하는 그의 철학이 생길 수 있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런 가치관이 그의 실행으로 드러났는데, 구체적으로는 애국계몽운동 단체들을 찾고 가입하는 과정에서 안창호, 이동녕 등의 주요 독립 인사들과 함께하였고, 국권 침탈 이후의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그들과 협력하고 함께 투쟁하는 사이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의 기간은 그에게 '독립 국가가 갖추어야 할 사회와 모습'에 대해 고려해보는 시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백범일지 세 번째, 신민회 사건(105인 사건)과 옥중생활]

 

'동양의 대악괴인 왜황을 나에게 전능을 베풀어 내 손에 죽게 하소서!'

 

신민회, 1907년에 만들어진 전국 최대규모의 애국 계몽단체이자 비밀결사 단체로 1911105인 사건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을사늑약 이후 교단에 서서 계몽운동을 지속해오던 김구도 신민회에 가입하고 그들과 협력하면서 애국 계몽을 위한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러던 중 1910년 군자금을 모으던 안명근이라 하는 황해도 사람이 잡히었고, 이를 계기로 하여 황해도 전반에 걸쳐져 있는 "배일 문화운동"을 뿌리 뽑기 위해 신민회 황해지도부의 간부, 지식층, 재산가 등 600여 명을 검거하였고, 1911년 안악 사건 관련자들에게 7~15년 형을, 신민회 주요 간부들에게 2년의 원도 안치 처분을 내리면서 결과적으로 신민회를 해체하게 만드는 결과를 불러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김구는 안악 사건 관계자로서 15년 형을, 신민회 주요 간부로서 2년 형을 선고 받게 되었고, 다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신민회 해체와 수감생활의 과정에서 김구는 독립운동가로서 온전히 거듭나기 위한 방안에 대해 마련하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수감 생활의 기간의 김구는 수감자들에게 독립운동의 필요성을 자극하며 진정한 독립운동가로 거듭나도록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지속적인 고문과 고통 속에서도 독립운동에 대한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이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 위의 문장을 통해 일제의 통치에 대한 문제점과 자신의 행위가 정당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대악괴'라는 어휘에서 감정적으로 '조선인이 가진 격노'를 표현할 뿐만 아니라,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고, 그들의 행위가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 또 자기 손으로 직접 죽이겠다는 표현을 통해서 독립운동에 대한 자신의 의지를 굳게 다지고, 독립을 위한 적극적인 투쟁의 길을 걸어갈 것을 명시하는 부분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김구는 연쇄적으로 발생한 '안악사건''신민회 해체'를 겪으며, '독립을 위한 행보를 전격적으로 선언'하였다고 볼 수 있고, '독립을 위한 길로 일본에 대응하는 단체와 여러 투쟁 방안의 필요성'에 대해서 고찰하였다고 생각한다. 또 출옥 이후 1919'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충칭까지 거치며 '독립을 쟁취하려는 노력'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김구'라는 인물이 중심이 되어서 여러 독립운동 활동이 활성화되고, 더 많은 지원을 끌어내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이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백범일지 네 번째, '나의 소원'을 통해 바라보는 김구와 한국독립사]

 

'내 소원이 무엇이냐 하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 독립이오"하고 대답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요, 또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백범은 '독립을 위한 투쟁'의 길에 있어서 단순한 '쟁취'에 목적만을 두고 살아가지 않았다. 그가 생각한 독립은 '쟁취'를 넘어서 '성취'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 항거의 시간 동안 그는 대한의 '자주독립'이 이루어지기 위한 방향성에 대해서 탐색하였고, 이를 임시정부 기간부터 광복 후 그가 암살당하기 전의 기간까지 항시 적용하려고 노력하였다. 나의 소원에 이와 관련된 부분이 자세히 드러나는데, 구체적으로는 '자유가 보장되는 국가'를 만들고,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으로 국가를 안정화되는 것을 이상적인 국가로 바라보았다. 또 타국에 침략당하지 않을 정도의 힘을 가지면서도, 타국을 침범할 정도는 되지 않는 '보통의 국가'를 추구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문화의 힘'만큼은 무한히 발전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특히 세계 문화를 선도해나가고, 발달한 문화로 타국과 함께해 나가는 국가로서 거듭나야 할 것을 이야기하였다. 나는 이 점에서, 김구의 인생과 한국의 독립사에 대해서 떠올려보았다. 그의 이 발언은 개인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식민 지배로 겪을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볼 수 있고, 사회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는, 새롭게 세워질 국가가 주변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가져야 하는 자세이자, 미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제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한국 독립사적 측면에서도 단순히 '독립'을 이뤄내기 위해서만 싸워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는 나라'는 무엇인지, '우리가 사랑하는 나라'는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하고, 반성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서 투쟁과 항거의 대상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의미를 되새겨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끌어나간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나의 소원'을 통해서, 나는 누구인지, 우리는 어떤 존재인지, 대한인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사고를 수정해나가며 '더 밝은 미래의,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들어 나가기 위해 '투쟁'한 것이었다. 어쩌면 이러한 점에 있어서 그는 '외세의 힘을 빌린 광복'을 단순히 좋게만 바라보지 않았던 것이고, 해방 3년사에서 '국가와 국민의 통합'을 위해 그가 열중한 이유를 바라볼 수 있다.

 

[1876~1949-대한민국을 바꾼, 대한민국을 바꿀 74]

 

이제 백범일지를 읽은 내 생각에 관해 이야기하고, 우리의 변화와 사회의 변화에 관해서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먼저 백범일지를 읽으면서 '김구'라는 인물에 대한 배경지식이 많이 변화하였다.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김구에 대한 카테고리는 오직 '독립운동가'였다. 임시정부 내부적으로는 독립운동가를 양성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 미국 등의 후원을 받거나 해당 국가들과 협력을 하므로 독립운동에 대한 불씨를 유지한 사람으로 기억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백범일지에 나온 김구는 '입체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동학농민운동 참여부터 치하포 사건, 감옥생활과 탈옥, 중으로서의 삶과 현실 세계로의 귀속까지를 다루는 과정을 볼 때, 그가 단순히 독립운동 시기에 나타나 독립운동을 펼친 이가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비슷한 계열의 투쟁을 반복해왔다는 그의 인생을 통해, '평범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중으로서 생활하다가 다시 귀속하는 등의 행보에서, 기존 역사 학습의 과정에서는 알지 못했던 인물의 삶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점이 인상 깊었고, 인물에 대한 판단을 더 다각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사건마다 나타나는 인물 중에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독립운동가들뿐만 아니라, 알지 못했던 여러 주요 인물들에 대해서도 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김구가 누구와 함께 독립운동을 진행하였는지에 대해서 파악할 수 있었다. 또 여러 이면 등을 통해 그의 사상뿐만 아니라, 감정적 호소까지 바라보면서 그가 독립운동의 길에 가담한 이유와 그의 행동에 나타나 있는 의미에 대해서 떠올려볼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백범일지는 '한국독립사'와 관련된 생각을 변화시켰다. 백범이 참여한 독립운동은 좁게는 '신민회 사건부터 광복까지', 넓게는 '치하포 사건부터 해방 3년사까지'로 볼 수 있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에 따른 기준점'의 설정이 아니라, 그가 지니는 '독립'이라는 것의 의미와 가치관, 나타난 행동 양상 등을 고려함으로 당대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과 독립운동가들의 삶, 사고방식, 행동 등 다양한 특징 등을 유추하고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특히, 치하포 사건의 이유가 되었던 '을미사변'이나, 애국계몽운동에 다시 전념하도록 만든 '을사늑약'과 같은 사건에 대해 대처하고, 독립을 위한 투쟁을 전개해나가는 점이 당대 비슷한 사상을 가지고 그와 함께했던 활동가들의 삶에 대해서 판단할 수 있게 도왔고, 이런 특징들이 모여 후에 '한국의 독립운동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이렇듯 김구의 74년의 인생을 담은 '백범일지''백범'이라는 개인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전체적인 한국 근대사와 독립사의 흐름에 대해 판단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었던 점이 기억에 남는 부분이자, 이 책이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그리고 나는 이 가치 있는 책이, 단순히 '역사적 사실'로써의 의미를 넘어서 '미래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준다는 점에 있어 더욱 특별하게 느껴진 책이다. 특히, 나의 관심 분야인 '행정 분야'와 관련되어 여러 가지 교훈과 가치를 얻어갈 수 있었다.

 

먼저, 정책을 펼치고 시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것이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공감성'임을 느낄 수 있었다. 타 독립운동가들과 백범이 가지는 가장 큰 차이라고 느꼈던 부분이, 평범한 국민들에 대한 이해와 공감에 있다고 본다. 김구가 성장할 때부터 겪었던 여러 가지 사건과 사회적 모습이, 그 당시 평범한 사람들과 비슷한 처지다는 점에서 '타인에 대한 연민'을 키울 수 있는 능력이 가치있다고 생각하였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김구가 임시정부의 주석으로서, 광복 이후 사회를 끌어나가는 리더로서 활동하는 동안에 많은 사람을 위한 정치와 정책을 펼칠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일부 정치인들이나 사회 지도자들이 '자신의 안위와 이익'만을 위해 행동하면서, '친일 청산'이나 '국가 통합 방해' 등의 여러 걸림돌을 만들었던 점과 달리, '사람에 대한 이해', '민본정치'를 펼치며 통합과 개혁을 위해 노력한 백범의 모습이 대비되며, '사람을 위한 사람'의 중요성을 보여주었다는 점이 가치 있다고 느꼈다.

 

두 번째로, '외교적 정책을 펼칠 때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의 소원'에서 말했듯이, 그는 강성한 국가를 만들고, 끌어나가기 위해서 외교적인 측면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무조건적인 팽창'만을 제창하면서 자국만의 우선주의를 펼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나라를 존중하고, 그들과 함께하는 세계시민의 모습을 갖추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런 외교 정책을 펼치고, 나라를 만들어나가기 위해서는 소프트웨어의 파워, 구체적으로는 '한국의 문화'의 중요성에 대해 강조하며 '세계문화를 선도하고, 이를 외교에 적용해야 한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부분이 급격하게 변해가는 현대 국제 정치의 모습에 있어서, 그리고 '자국 우선주의''팽창주의'가 팽배한 국제 정세에 있어서, 우리나라만의 외교 방향성을 보여주고, 슬기롭게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는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도 적용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자유와 평등을 추구하기 위한 경제적 안정성'에 대해서 떠올려보는 기회가 되었다. 첫 번째, 두 번째 항목이 조금 더 유연하게 시행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가 경제의 안정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모두를 위한 정책을 펼치고, 모두를 위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안정적인 경제 상황을 통해, 발전된 사회를 구축해 나가야 하고, '문화를 선도하는 국가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결과적으로 모든 국민이 문화를 생산해내고, 체험할 수 있을 정도의 경제적 보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백범일지에서도, '먹고 살 수 있을 정도의 경제력이 보장되는 나라'로 성장해야 함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경제의 중요성을 느낄 수 있었고, 백범이 추구하는 정치이념인 '자유' 그리고, 모든 사람이 사회에 있어 '평등'한 위치에 안착하기 위해 '경제에 대한 안정성'이 무조건 보장되어야 함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자유'/'평등'/'정의',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공정하고 발전된 사회의 모습이자, 우리가 추구하고자 하는 이상향의 모습이다. 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라고 말했듯이, 백범을 통해 우리 역사, 우리 사회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미래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투쟁의 삶'을 이어온 김구를 떠올리며, 우리들도 각자, 나름의 '투쟁의 삶'을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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