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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백범지기] 독립에 대한 의지로 가득했던 매헌 윤봉길 의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21-12-17 조회 2381
첨부파일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목에 건 윤봉길 의사.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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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에 대한 의지로 가득했던 매헌 윤봉길 의사

 

 

2021 백범김구기념관 서포터즈 백범지기 장명진

 

 

올해는 가을이 너무 짧다고, 추위가 유난히 더 빠르게 다가왔다고 느낀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벌써 12월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2022년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고 있는 요즈음입니다. 다가오는 12월 19일은 ‘윤봉길 의사 순국 제 89주기’입니다. 따뜻한 연말을 보내고, 새해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윤봉길 의사를, 그리고 이 날을 꼭 기억해주시길 바랍니다.

 

 

 

​농민운동 기록화 (이종상 作) (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에서 출생하였습니다. 1919년, 12세였던 윤봉길 의사는 3·1운동에 자극받아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자퇴하였습니다. 이후 동아일보와 개벽 등을 통해 신문물과 신사상을 수용하였고, 1926년, 19세의 나이에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였습니다. 농촌계몽운동은 개화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추진한 운동으로, 윤봉길 의사는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농촌에서 이웃들의 무지를 깨우치기 위해 야학을 설립하여 토론회, 강연회, 학예회 등을 개최하였습니다.

 

1930년, 실력양성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전환하기로 결심한 윤봉길 의사는 ‘사내대장부가 집을 나가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의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을 남기고 국외 무대인 중국 상해로 진출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했던 윤봉길 의사의 굳은 의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윤봉길 의사 한인애국단 입단 선서문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제 주요 인물의 암살을 목적으로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윤봉길 의사는 이듬해 1932년, 김구 선생을 찾아가 의열투쟁의 뜻을 전하고 4월 26일, 마침내 한인애국단의 단원이 되었습니다. 4월 29일에 홍커우 공원에서 일제의 상해사변 전승행사 및 일왕 생일 축하기념식이 열린다는 소식을 들은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는 의거를 계획하였습니다. 다음 날 윤봉길 의사는 일제의 주요 인사를 반드시 처단하겠다는 굳센 의지를 담아 김구 선생에게 자신의 생애를 기록한 자필 이력서 및 4편의 유촉시를 작성하여 전달하였습니다. 그리고 3장의 기념사진을 촬영하였습니다.

 

 

    

  4·29 의거 기록화 (이종상 作) (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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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9일 거사 당일, 양복을 입은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과 수통 폭탄을 어깨에 맨 채 홍커우 공원에 도착하였습니다. 현장은 일왕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인 수많은 군중으로 가득했고, 일본 군인들의 삼엄한 경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2부 축하식이 시작되고 일본 국가가인 기미가요가 끝나갈 무렵, 윤봉길 의사는 단상 위의 일본 수뇌부 7명을 향해 수통 폭탄을 투척하였습니다. 한가운데 명중한 폭탄으로 인해 2명이 사망하였고, 5명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이후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으로 자결하려고 했으나, 사용하기도 전에 체포되어 결국 상해파견군 헌병대 제1분대로 압송되었습니다.

 

 

 

  옥중에서 취조받던 당시의 윤봉길 의사(25세) (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모진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직접 의거의 배후는 밝히지 않았습니다. 같은해 5월 25일, 일본군 상해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일본 오사카로 호송된 뒤 12월 19일, 윤봉길 의사는 가나자와 육군형무소 공병작업장에서 총살형으로 25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였습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검찰관이 사형집행을 알리고 유언이 있는지 묻자 윤봉길 의사는 ‘사형은 이미 각오하여 이에 임하여 하등의 할 말이 없다’라고 답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마지막까지 윤봉길 의사는 독립에 대한 의지로 결연하였고, 끝까지 기개를 잃지 않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한인애국단 선서문을 목에 건 윤봉길 의사 (출처: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윤봉길 의사의 상해 의거는 당시 침체에 빠져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기능을 회복시켰습니다. 임시정부 내부의 결속력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임시정부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동포들도 증가하였습니다. 상해 의거와 관련된 수많은 기사들이 쓰여졌고, 이를 통해 우리나라가 끊임없이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전세계에 알려졌습니다. 중국의 국민당 정부 장개석 총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독립에 대한 희망이 사라져가던 시점에서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광복에 대한 자신감과 용기, 희망을 고취시켰다는 점에서 윤봉길 의사의 의거는 감히 형용할 수 없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삼의사 국민장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김구 선생은 광복 이후 유해봉환사업을 통해 타국에서 돌아가신 독립운동가들의 유해를 고국으로 모셔왔습니다. 국민장을 끝낸 후, 윤봉길 의사의 유해는 효창원 삼의사 묘역에 백정기 의사, 이봉창 의사와 함께 안장되었습니다.

 

 

 

      한인애국단 단장 김구 선생과 단원 윤봉길 의사 (출처: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

 

짧지만 강렬했던 윤봉길 의사의 생애를 통해 다가오는 12월 19일에 윤봉길 의사를 기리는 시간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하나로 온 힘을 다해 노력하여 현재 우리가 ‘자유로운 대한민국’에서 영위하고 있는 삶을 가능하게 한 독립운동가들에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들의 숭고한 노력과 헌신을 절대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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