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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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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백범일지』를 읽고
작성자 신예진(벌교상고) 개최일 2018-07-10 조회 554

백범일지를 읽고

 

벌교상업고등학교

1학년 3반 신예진

 

난 아무리 조선시대가 엄격한 신분사회였다지만, 그 많은 지배층들 중 차별하는 건 윤리적으로 불평등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이 드물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 물론 시대에 따라 갖는 가치관이 다르겠지만 말이다. 내가 궁금한 것은, 관을 썼다는 것이 조선시대 당시 법에 어긋나는 건 맞는 사실이지만 그것이 법으로 지정될 만큼, 그들에겐 신분이라는 이름의 권력이 그토록 삶에 중요한 요인일까? 생명을 멸시하면서까지 꼭 지켜내야만 했는가? 어릴 적 김구 선생께서 그 상황을 목격하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느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 신분상승을 위해 배움의 길을 택하신 사실도 정말 배워야 할 자세라고 본다. 생각에서 끝이 아닌 실천까지 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요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도 생각에서 멈추지 말고 행동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후에,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과거에 떨어진 사실은 정말 안타깝다고 생각한다. 현재 사회에서도 채용이나 각종 시험 등에서 일어나는 부정행위 때문에 빛을 못 내는 인재들이 많다. 난 그런 기사를 많이 봐왔던 터라, ‘그 당시 김구 선생이 얼마나 절망스러웠을까하는 마음이 든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고 다른 분야인 관상에 도전한 것이 놀라웠다. 그 과정에서 겉모습이 아닌 마음을 닦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얻은 교훈은 현재 외모지상주의에 휩싸인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교훈이라는 생각이 든다. 교훈을 얻고 만인이 평등하다라는 사상을 가진 동학이라는 종교에 입문 하신 게 나에게는 신기하고 생소하였다. 중학교 때, 역사 교과서에서 최제우가 창시한 민족 종교라는 사실까지만 간단히 배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실제 믿는 사람이 많았고, 그 중 김구 선생께서도 입도하였다는 사실에 신기하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본래 이름인 창암에서 창수로 개명하였다는 건 이름을 바꿈과 동시에 사회를 바꾸고 싶다는 김구 선생의 굳은 의지가 느껴진다. 그리고 일어난 동학농민운동또한 중학교 때 역사책에서 배운 기억이 있다. 정말, 이 운동은 들을 때마다 안타깝고 화가 난다. 이 운동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바로 탐관오리의 행패와 수탈 때문이다. 그런데 청나라와 일본이 갑자기 끼어들어, 당시 부패한 조선정부와 함께 농민들을 마구잡이로 사살하였다. 나는 2002, 민주주의 국가에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해보면 다행이 아니라 마땅히 존중받고 행세해야할 권리인데, 조선시대에선 누리지 못한 사람들이 많아 더 안타깝게 느껴진다. 동학농민운동에서 패배한 김구 선생께서도 실의를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관군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의에 빠진 김구 선생을 구해준 사람이 안태훈 선생이라고 한다. 안태훈 선생에 대해 알지 못하였던 나로서는 안태훈 이라는 인물을 책을 읽고 처음 알게 된 것인데, 안태훈 선생은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라고 한다. 알게 된 후에 정말 깜짝 놀랐다. ‘인연도 이런 인연이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고,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는 것 같다. 내가 정말 존경하고 본받고 싶어 하는 두 사람이 역사적으로 이렇게 만나게 되었다는 게 신기하고 놀라울 뿐이다. 더불어 안태훈 선생과 함께 알게 된 김구 선생의 스승, 고능선 스승에 대해서도 처음 들어보게 되었다. 그래서 고능선 스승에 대해 알기 위해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았다. 찾아보던 중, 마음에 드는 고능선 스승의 명언을 발견했다. “가지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그다지 대단한 것은 없다. 그러니 벼랑에 매달려 잡은 손을 놓을 수 있어야 장부라 할 수 있다.” 이 명언을 보고 포기라는 것에 대해 이렇게 쉽게 설명할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포기라는 단어를 보면, 부정적인 이미지가 드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하나의 과정일 뿐, 포기로 인해 모든 게 끝나는 건 아니니 말이다. 결론은, 김구 선생이 고능선 스승에게 왜 죽고 못 살 정도로 잘 따랐는지 이해가 된다는 것이다. 배울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소중하게 느껴지고,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능선 스승의 가르침 덕분에 김구 선생이 배울 수 있었고,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많은 영향이 있었다고 본다. 고능선 스승은 김구 선생에게 결단력이라는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 ·일 전쟁에서의 패배로 인해 청나라가 약해지고 일본이 강해지면서 조선이 망국에 빠졌다고 전했다. 그래서 김구 선생은 상황을 알아보고 동지들을 찾기 위해 청으로 떠났다. 나라면 일단 다른 나라로 떠나는 것 자체가 두렵고 무서웠을 것인데 김구 선생의 선택이 정말 결단력 있었던 것 같다. 그 사이 일본은 친일 내각을 형성하였고 1895, 일본은 반일 세력에 중심에 있던 명성황후를 시해하였다. 그 영향으로 왕실의 위엄은 땅에 떨어졌고 나라는 슬픔에 잠겼다 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 분통터지는 사건이다. 당시, 고종과 함께 나라를 다스린 현명한 인물로 배웠다. 그런 인물이 어처구니없이 일본에 시해 당하였으니, 어릴 때부터 일본에 압박당해온 고종은 그 사건이후로 얼마나 두려웠을까 싶다. 을미사변 후, 일본으로부터 단발령이 선포되고 고종이 가장 먼저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평양에 돌아가니, 백성들이 길거리에 붙잡혀 상투를 잘리고 있었다 한다. 당시 백성들이 얼마나 울화통 터지고 부끄러웠을까? 강제로 머리카락 잘리는 것도 서러운데, 나라의 왕이란 사람이 가장 먼저 시범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명성황후가 시해되지 않고 살아있었다면, 그 지경까지 사단이 났을까 싶다. 반발에 단발령이 중지되고 김구 선생은 귀향한 후, 우연히 마주친 일본인인 스치다를 살해한다. 그 사실이 얼마 안 되어 일본 신문에 보도되었고 일본 정부에선 스치다를 살해한 범인을 찾기 위해 조선 정부를 꾸준히 압박했다고 한다. 결국 김구 선생은 인천 감리서로 체포되었다. 이 사건이 첫 번째 투옥의 이유라고 한다. 내가 일제강점기 때 살지 않았어도, 일제강점기 이야기만 들으면 일본에 화가 나고 괴리감이 느껴지는데 그 시대에 살았던 분들이라면 일제 소리에 얼마나 치가 떨릴지 싶다. 그 상황 속에서도 옥에서 독서를 통해 깨우침을 얻은 김구 선생은 정말 대단한 것 같다. 그 깨우침은, 서양에 대한 책을 읽고 서양 사람은 무조건 오랑캐라는 잘못된 편견을 버린 것이다. 또한, 조선 탐관오리에겐 오랑캐라는 칭호조차 아깝다고 하였다. 더불어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통해 왜 조선이 일제에게 패했는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나 같으면, 가족이 보고 싶고 언제 사형당할 지 두려워서 옥에서 벌벌 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독서를 하는 것은 정말 상상을 초월하며 안일해하지 않고 매우 침착한 김구 선생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사건을 알게 된 고종이 김구 선생의 사형 집행을 취소시켰다는데 이때까진 이걸 보아, 그래도 고종의 권력이 땅을 치는 수준으로 내려가진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사형 집행만 취소되었지 계속된 옥살이로 탈옥을 시도한 김구 선생은 오랜 유랑생활을 마치고 충남 공주의 마복사로 들어갔다고 한다. 김구선생이 체질이 튼튼하였다는 것은 정말 다행인 사실이다. 어떻게, 감옥에서 5년 간 견딜 수 있겠는가? 마복사에 들어가 마음을 다잡은 김구 선생은 승려가 되기로 결정하였다. 스님이 되고 끝내 상투를 자른 김구 선생의 마음이 얼마나 애달팠을지 싶다. 난 김구 선생이 승려가 되어 머리를 비우고 마음을 비워야 됐을 정도로 나라에 분노와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한 거라 예상이 된다. 한편, 1904년 우리나라에 대한 지배권을 두고 러·일 전쟁이 일어났고,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제는 우리나라와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한다. ‘을사늑약에 대해선 잘 알고 있다. 우리 중학교 때 역사 선생님께선 수행평가를 교과서에 있는 내용을 가지고 PPT로 만들어 발표하는 방식으로 시행하셨다. 그런데 내가 그때 발표했던 내용이 을사늑약에 대한 내용이었고, 찾으면서 아주 많은 사실을 알게 된 난, 그 때를 계기로 여러 역사 영화들을 챙겨보게 되었다. 사실 역사에 대해선 초등학교 때부터 관심이 많았고, 그러다 보니 역사 중 한국사는 나에게 수학이나 영어보다 필수로 알아야 할 과목이 되었다. ‘을사조약이 아닌, 강제로 체결했다는 의미의 자를 붙여 을사늑약이라고 해야 한다. 조약이란, 서로 간의 합의를 통해 맺은 것이지만, 당시 일제는 우리나라의 동의 없이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또한 을사늑약 문서의 어디에도 고종의 친필 사인은 없고, 일제가 몰래 훔쳐간 고종황제의 도장만 찍혀있었다 한다. 이때부터 조선은 사실상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이다. 고종이 자신의 입으로 을사늑약을 체결한 적 없다고 직접 말했는데도, 일본이 아직까지 우기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뻔뻔스럽기 그지없다.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가 된 후, 김구 선생은 학교나 학교가 아닌 오지에서 환등기를 통해 수업을 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은 수업에서 종종 일본의 야욕을 주지시켰고 환등기로 고종 황제의 사진을 띄워, 일제 장교까지 경의를 표하게 하였다. 이 일화를 통해 그 당시에 학교로선 상상도 못 하는 일이었음에도 김구 선생이 정말 패기가 대단하신 것 같고, 나라를 무척 아끼고 사랑하시는 게 느껴진다. 물론,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김구 선생에게 배우러 오는 학생들 또한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짊어진 책임감이 강하다고 생각되고 너무 멋있다. 그렇게 수업을 하다,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고, 안중근 의사를 조사하던 일제는 김구 선생의 존재를 알게 돼 체포하게 된다. 다행히 김구 선생은 무혐의로 풀려나게 되었지만, 조선은 1910년 일제에 강제 합병, 일명 한·일 합병이 체결되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어떤 면으로는 고종황제가 안 됐지만, 조선이 이 지경이 된 것은 고종이 일제에 현명하고 결단력 있게 대응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일 합병으로 인해 조선의 애국지사를 체포하는 일이 더 심해졌고, 발단은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명근이 군자금을 모으다 발각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제는 항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이 사건을 더 과장하고 조작하였다. 그리고 ‘105인 사건에 대해선 교과서에서 배웠던 기억이 난다. 항일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미수사건을 조작하여 무고한 105인의 독립 운동가를 감옥에 가두고 신민회원 600여 명을 유죄로 체포한 사건이다. 이로 인해 일제는 신민회를 해체 시켰는데, 이 사건만 봐도 무식하고 같은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105인 중 김구 선생도 포함되어 있었는데, 김구 선생은 동포들을 위해 입을 열지 않아 밤을 새워 불로 지지는 등 더욱 더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정신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라를 위해 한 몸 바친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 것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 상황에서 건강한 것보다, 독립 운동을 한 것이 기쁘다고 생각하신 김구 선생의 어머님도 말이다. 우리 부모님께서 7~8달 만에 날 만나서 그 소리를 했다면 정말 서운한 마음이 들었을 것인데, ‘김구 선생의 애국정신은 어머니를 통해 얻은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읽으면서 괜스레 눈물이 났다. 말은 저렇게 하셨지만, 나라를 위해 몸을 가누지 않는 아들을 보며 얼마나 억장이 무너지셨을지 싶다. 그 시기에 독립정부가 세워지고 김구 선생은 마지막으로 이름을 바꾸고 호를 백범으로 정했다. 백범의 뜻은 백성과 천민(피하계층)을 위한 삶을 살겠다는 의지가 담겨있고, 김구의 자를 쓰기 쉬운 아홉 구자로 바꾸셨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조선 시대에 태어났다면, 아마 세종대왕만큼이나 백성을 사랑하는 임금이 되셨을 것 같고, 한 평생을 나라를 위해 바치신 분이라 생각 돼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든다. 김구 선생은 15년 형을 받았는데 5년째에, 40세의 나이로 석방되게 된다. 지금은 평균 수명이 늘었지만, 조선시대 당시에는 50살만 살아도 장수했다고 여겨지는데 저때 김구 선생이 수감되어 보내진 시간이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가 191931일에, 전 세계적 최초의 만세운동인 ‘3·1운동이 일어났고 3일 동안 7천 여 명이 학살되었다. 3·1운동에는 국민 2000만 명 중 무려 10%가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한다. 3·1운동에 대해선 항상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다. 특히, 유관순 열사께서 투쟁하셨을 때의 나이가 현재 내 나이인 17세와 같기 때문에 더 많은 생각이 들게 된다. 3·1운동 당시에 여러 총기들로 독립 운동가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 우리나라에서 독립 운동을 하기에는 힘들겠다는 걸 느낀 김구 선생은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당시 교통의 중심지였던 상해엔 임시정부가 세워졌고, 김구 선생은 도산 안창호 선생을 찾아가 임시정부의 문지기가 되고 싶다는 부탁을 하였다.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을 예시로 들어, 평소 나의 소원이라고 말하였다 한다. 김구 선생은 문지기라는 말과 나의 소원이라는 말을 좋아하시는 것 같다. 그 후에 김구 선생은 경무국장으로 임명되었고, 그 당시 대통령은 이승만, 국무총리는 이동휘였다. 경무국장은 일본의 밀정, 반역자를 처단하는 역할을 하였고 김구 선생은 아주 열심히 역할을 수행하였지만, 얼마 안 가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민주주의와 이동휘의 공산주의의 두 개의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로 인해 독립 운동가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임시정부는 결국 임대료 등으로 인해 간판만 남게 되었다. 그 간판만 남은 임시정부를 김구 선생 혼자서 지켰다고 하는데, 너무 눈물이 나온다. 내가 유치원 때 집에서 본 그 외국인들이 대다수를 차지하던 위인전들 중 기억에 남는 한국인이 딱 두 명 있다. 바로, 이순신 장군과 김구 선생이다. 그 땐, 이해가 어려워서 잘 알지 못하였던 김구 선생을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잘 아는 독립 운동가는 도산 안창호 선생,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유관순 열사, 윤동주 시인이 전부였다. 물론, 앞으로 더 지식을 넓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론은 이제라도 김구 선생에 대해 알 수 있어서 무척 다행이고, 지금까지 김구 선생을 잘 알지 못하였던 내가 참 부끄럽다는 생각이 든다. 상해로 와서 어머니, 아내, 인과 신의 두 아들과 화목한 가정을 꾸리나 싶었던 김구 선생은 얼마 안 가 아내가 사고를 당하는 비참한 상황을 맞이하였다. 병원에 가야 했으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끝내 가지 못한 김구 선생의 아내는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20년 동안 결혼생활을 하였지만, 독립 운동과 투옥으로 인해 결혼 생활은 그에 절반밖에 미치지 못 했다. 참 항상 착한 사람이 먼저 가는 현실이 너무 불공평하다고 생각한다. , 김구 선생은 독립 운동으로 인해 둘째 아들, 신을 키울 형편이 못 돼 중국의 고아원에 아기를 맡겼다. 자식을 고아원에 맡기면서 느꼈을 죄책감이 어느 정도였을지 상상이 안 가고 상황이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에 계속 가난으로 허덕인 김구 선생은 어머니와 아들을 고국으로 돌려보내고 10년 동안 보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에 얼마나 그리웠으면, 아버지가 보낸 편지를 보고 냄새까지 맡았을까? 정말 고통스럽고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되고, 많은 것을 포기하고 독립운동을 하신 김구선생께 너무 감사하다. 다행히도, 점차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를 위해 돈을 지원해주는 동포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현재 나이로 50세 쯤 되어도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육체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며, 앞날이 암흑과 같은 것인데 그 당시에 속히 말하는 언제 갈지 모르는 나이인데도 나라를 위해 큰일들을 많이 하신 김구 선생이 너무 존경스럽고 나도 그런 열정과 끈기를 배워야겠다. 이후 1931, 중국을 침략하기 위한 명분을 찾던 일제는 만주 사변을 일으켜, 중국 만주를 점령한다. 중국이 일제에게 만주를 점령당하고, 이제 중국도 조선에게서 등을 돌리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불분명해진 것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도 김구 선생은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였다. 한인애국단에 이봉창 의사가 찾아오자, 말에 반은 일본어를 섞어 쓰는 행동에 의심이 든 김구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봤다. 그러다가, 술에 취한 이봉창 의사는 자신이 폭탄을 소유하고 있다면, 당장이라도 일본 천왕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을 하게 되었고, 김구 선생은 이봉창 의사의 말을 유심히 들었다. 김구 선생은 2년 동안 폭탄을 2개 준비하였고, 폭탄 중 1개는 천왕제거용, 나머지 하나는 자살용이었다. 거사를 치르기 전, 기념사진을 찍고 이봉창 의사는 김구 선생의 슬픈 표정을 읽고 이런 말을 하였다. ‘난 영원한 즐거움을 위해 떠나는 것이니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라고 말이다. 예전, 초등학생 혹은 중학생 때 독립기념관을 갔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 사실은, 독립 운동가들은 자신이 언제 죽게 될지 모르니까 항상 깔끔한 복장으로 다니고 사진을 찍었다는 것이다. 그 얘기는 들었을 당시에도 지금도 정말 독립 운동가 분들이 멋있고 대단하신 분들이라는 것을 느낀다. 특히, 이봉창 의사의 저 말 또한 맞는 말이지만 저렇게 말하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셨을지 감히 상상할 수가 없다. 이에, 김구 선생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사진 속에 이봉창 의사는 자신의 선언문을 들고 있었다. 결국 19321, 도쿄에서 폭탄이 터졌다. 신년관병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천왕에게 이봉창 의사가 폭탄을 던진 것이었다. 끝내, 천왕은 맞추지 못하였지만 그 사건을 계기로 일본은 그야말로 거꾸로 뒤집어 졌다고 한다. 난 정말 그 패기가 존경스럽다. 일본의 총리 개념도 아닌, 무려 천왕을 폭탄으로 맞출 계획이었다는 것은 다시 봐도 믿기지가 않는다. 천왕은 일본 국민들에겐 거의 에 가까운 직급인데 만약 그 당시 폭탄 작전이 성공했다면, 일본의 역사가 새로 쓰이는 수준의 계기가 됐겠지? 이봉창 의사는 22살의 나이에 사형을 받게 된다. 젊은 나이에 독립 운동을 하시다 가신 것이 많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 앞날이 창창하고 패기가 넘치는 그런 20대를 독립 운동을 위해 힘쓰시다가 가신 것이 말이다. 물론, 나도 독립운동을 한다면 내 나이가 몇 살이든 할 것이지만 그래도 일본 때문에 죄 없는 사람들이 죽는 게 너무 안타깝고 화가 난다. 이봉창 의사의 의거로 인해, 독립 운동을 위해 김구 선생을 찾아오는 청년들이 늘었다고 한다. 그 중 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윤봉길 의사가 찾아왔다고 한다. 윤봉길 의사는 채소 장사를 하는 건 큰 뜻을 안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고 말하였다. 그 뜻은 아마, ‘해방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 후, 윤봉길 의사는 거사를 치루기 전에 김구 선생에게 시계를 바꾸자고 제안하였다. 본인의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산 6원짜리인데, 김구 선생의 시계는 2원짜리라고, 자신에게는 1시간밖에 시간이 없다고 말이다. 그 말을 하고 윤봉길 의사는 떠났고 김구 선생은 후에 지하에서 만나자고 작별 인사를 건넸다. 이 독후감을 쓰는데, 눈물이 너무 많이 나온다. 난 정말 평화로운 세상에 살고 있고 걱정이 없는 편이다. 도대체 세상은 왜 이렇게 불공평한가. 독립 운동가 분들은 무슨 죄 때문에 저 시대에 태어난 것이며, 저 시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일본에게 사람대접도 못 받은 것일까? 일본은 우리나라에게 그런 만행을 저질로 놓고 사과를 안 하고도 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며, 독립 운동가 분들 외에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은 도대체 왜 짐승만도 못한 사람에게 사과 한 마디를 못 듣는 것일까? 너무 불공평하고, 이해 또한 되지 않는다. 현재도 일본이 독도나 대마도 등 문제에서 오히려 당당한 모습이 너무 웃기고 그럼에도 강력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우리나라가 참 안타깝다. 이러다가, 식민지가 된 최초 원인인 을사늑약을 체결했을 때처럼 외교적 문제에 고분고분 하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또 한 번 과거와 같이 나라가 무너지는 건 아닐지 싶다. 19324월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선, 천왕 생일 파티로 10만 명이라는 큰 인원이 참석했다. 일본인으로 위장한 윤봉길 의사는 1140분에 단상을 향해 물병에 든 폭탄을 던졌다. 천왕을 제외하고 높은 지위의 일본인들이 다쳤다. 결국 그 자리에서 윤봉길 의사는 체포당했고, 김구 선생은 외신을 통해 한인애국단과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의거 등과 모든 게 본인의 계획이었음을 밝힌다. 그 후로, 상하이의 모든 거리에 현상수배지가 뿌려졌고, 현상금은 60만원이나 되었다. 그 당시에 60만원이면 엄청난 금액이었을 것인데, 현상수배지가 뿌려지고 나서 김구 선생은 두렵지 않았을까? 그런데, 외신에 자발적으로 모든 것을 밝힌 것은 일제에 대해 두렵지 않다는 간접적인 의미가 있었던 행동으로 보인다. 수배를 피해 상해를 탈출하고 김구 선생은 거처를 중국 자싱으로 옮긴다. 자싱은 교통의 중심지였는데, 일제는 김구 선생을 잡기 위해 자싱을 지나는 모든 기차를 검문했다. 그곳에서 김구 선생의 은신처는 문이 겹겹이 막혀있는 미로와도 같았다고 한다. 검문을 피해 살면서, 정말 마음이 갑갑하였을 것 같다. 은신처의 비상탈출구는 호수와 연결 돼 있었으며, 호수와 연결된 계단 옆엔 늘 배가 마련 돼 있었다고 한다. 은신처를 마련해 준 사람은 상해 법대의 총장이었던 저보성이라는 중국인이었다. 당시 김구선생은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중국인으로 무장하고 다녔다고 한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온갖 차별과 행패를 받던 그 시대가 나는 너무나도 싫다. 윤동주 시인의 뛰어난 글 솜씨도,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책을 못 내게 하던 일제 때문에, 결국엔 꿈에 그리던 자신의 책이 출간되는 것도 못 보고 하늘로 돌아간 안타깝고 열이 뻗치는 대접을 받았으니 말이다. 어쩜 신이 내린 것과 같은 글 솜씨를 가진 대단한 작가에게 그런 푸대접을 한 것인가? 일제강점기 때 안타깝게 떠나보낸 우리나라의 인재들이 너무 많아, 일본이 더욱 밉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문화, 인재, 자원 모든 것을 앗아갔다. 그래서 일본은 요즘 인기를 얻고 있는 수면 휴족등과 같은 생활 용품이 발달했다고 한다. 이유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인체실험을 통한 연구 결과를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윤동주 시인도 감옥에 있을 때, 일제가 강제로 이상한 주사를 투입하였고, 다른 독립 운동가 분들 또한 감옥에 있을 때 일제에서 이상한 약을 먹이고 주사를 투입하는 등 온갖 인체 실험을 당하였다고 한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요즘에도 동물 실험 때문에 난리가 나는 세상인데, 동물도 아닌 사람에게 그런 짓을 할 수 있는가? 너무 역겹다. 같은 사람을 실험 대상으로 생각한다는 건, 그저 괴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결국 현상수배로 인해 임시정부는 점점 더 어려워져 갔다. 김구 선생은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았다. 뱃속에서 책을 보고 마음을 다잡고 임시정부를 생각했으며, 그 곁엔 주애보라는 사람이 있었다. 5년 동안 배를 타며 도피 생활을 하다가, 중국 최고 권력자 장개석을 만나게 된다. 장개석은 여러 폭탄 사건을 통해 임시정부를 주목하였다고 한다. 만남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그 만남을 통해 독립 운동을 위한 여러 자금을 조달받았고, 김구 선생이 임시 정부의 대표 지도자가 된 계기가 되었다. 정말 이 만남은 다행이었다고 생각한다. 5년 동안 바다에서 배를 타고 책만 읽는 시기를 보내면 나로선, 정신병이 올 것 같은데 그 상황에서 독립 운동을 위해 마음을 다잡고, 또 다잡는 김구 선생의 정신력은 정말 국보급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 옆에서 김구 선생을 도운 주애보라는 사람도 독립 운동을 위해 5년이라는 고단한 시간을 견뎠다는 게 참 끈기가 없는 나로선 배워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1937년 중·일 전쟁으로, 중국 난징에는 무차별적으로 폭탄이 떨어졌다. 다행히, 김구 선생은 잠을 자다 소리를 듣고 깨어나 은신처의 천장에 깔려죽는 등의 죽음을 면하였다. 임시 정부 또한 창사로 옮기기로 하였고, 100여 명의 임시정부 식구들은 목선에 의존해 장강을 거슬러 올라갔다고 한다. 그곳에서 역풍을 맞으며 사람들이 직접 밧줄을 짊어지고 배를 끌고 갔다. 사람이 배를 끌고 가다니, 게다가 100여 명 뿐인데도 말이다. 정말 너무 힘들었고 죽을 힘을 다 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마침내 중국 창사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김구 선생이 창사로 거처를 옮긴 이유는 곡식 값이 싸고 홍콩과 가까워 해외와 계속 통신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도착한 후부터는 다시 김구로 생활하였다고 한다. 후에 김구 선생은 창사 낙목당에 조선의 여러 지배층들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총격이 일어나 한 명이 즉사하고 김구 선생을 포함한 3명이 총상을 입었다. 어떻게 위치를 알고 찾아온 것일까? 일본에서 행한 짓은 스토킹과 다름없는 범죄인데, 당시 독립 운동가들은 정말 두려웠을 것 같다. 나도 초등학생 때, 인터넷에서 중국의 인육데이라는 찌라시를 보았다. 그 글의 내용은 중국에서 7월 며칠인진 기억이 안 나지만 정해놓은 날짜에 어린이들을 잡아 몰래 데려간 후 토막 살인을 하니 조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 글을 읽고 나서, 학교를 마친 후 집에 가면서 정말 무서웠다. 당시에 내 핸드폰이 스마트폰이 아니라, 일반 폴더 폰이었기 때문에 걸으면서 전화밖에 할 수 없었다. 너무 무서웠는데 친구들도 전화를 안 받고, 주변에 사람도 없었다. 햇볕이 쨍쨍하고 매미소리만 들리는데 당장이라도 누군가가 날 잡아간다면 소리, 소문 없이 바로 잡혀갈 것 같았다. 손이 벌벌 떨리고 식은땀을 뻘뻘 흘렸지만, 뛰어가면 뒤에서 누가 따라올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누군가가 나를 따라올 수도 있다는 사실이 큰 두려움이었는데, 독립 운동가 분들은 얼마나 무서웠을까? 심장에 총을 맞은 김구 선생은 가망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문 밖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기적적으로 상태가 좋아지면서 급기야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다. 총알이 조금만 더 들어갔다면, 정말 위험했을 것이었다고 한다. 장개석은 중·일 전쟁을 지휘하면서도, 김구 선생의 치료비를 보내고 병문안을 왔다고 한다. 나는 솔직히, 중국에 대한 인식이 별로 곱지 못하였다. 일본이 독도와 대마도라면, 중국은 우리영토인 간도를 빼앗아 갔기 때문이다. 일반 사람들은 독도와 더 나아가면 대마도의 영토문제까지만 알고, 대부분 간도에 대해선 모른다. 나도 대마도까지만 알다가, 설민석 강사의 역사 강의 영상을 보고, 간도에 대해 알게 되었다. 간도는 원래 우리의 영토였지만, 중국과의 간도협약때문에 뺏기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발길이 드물어지면서 중국이나 일본의 유이민들이 몰래 땅을 개간하였고 그걸 막기 위해 백두산에 정계비를 건립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간도 이주민들을 강제로 쫓아내었고, 일본은 일제강점기 때 얻은 을사늑약을 이용해 조선의 간도를 넘겨주는 대신, 남만주의 철도부설권을 얻는 간도협약을 체결함으로써, 우리의 영토인 간도는 강제로 중국의 영토가 되었다. 중국 측에선 협약을 체결하여 이미 끝난 일이라고 하지만 애초에 을사늑약부터 강제로 체결한 불공평하고 말이 안 되는 협약이기 때문에, 간도협약도 무효가 된다. 우리나라에서 다시 간도를 되찾기 위해 여러 노력을 하고 있지만, 결과는 미지근하다. 무튼,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중국과 일본을 같은 나라라고 봤는데, 과거에 중국에서 저렇게 감사해야 할 분이 있었다는 게 참 놀라웠다. 치료를 마쳤지만, 김구 선생은 살아있는 평생을 가슴에 총이 박힌 채로 살아야 하였고 후유증으로 손이 떨려 사건 이후로부터 김구 선생의 글씨는 떨린 상태였다고 한다.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김구 선생은 자신의 글씨체를 총알체라고 불렀다고 한다. 정말 멋진 분이다. 김구 선생은 끊임없이 해외 동포들과 여러 중국인에게 독립 운동 지원을 요청하러 다니다가, 아들인 인에게 조부모의 몸이 편찮다는 소식을 듣는다. 결국 김구 선생의 어머니였던, 곽낙원 여사는 김구 선생의 앞에서 숨을 거뒀다. 아들의 독립 운동을 지원해주면서 몸을 가누지 않아, 많이 건강이 쇠약해졌던 것이었다. 정말 위대하고, 또 위대하신 어머니라는 생각이 들고, 옛날로 따지자면 한석봉의 어머니와 같이 자식을 사랑하신 분 같다. 김구 선생의 나이가 50이 넘었을 때인데 정말 장수하신 것 같아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80년이나 장수하셨다. 정말 와 소리가 나올 정도로 놀랐다. 그 힘든 시기를 80년이나 겪으셨다니, 정말 고생을 많이 하셨을 것 같고 김구 선생과 더불어 기억해야 할 대단한 분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구 선생이 머물렀던 충칭은 대기 오염이 심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조선인 400명 중 80여 명이 호흡기 질환으로 숨질 정도였다고 한다. 김구 선생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로, 중국 대기오염으로 인한 호흡기 질환으로 사망하였다. 두 명의 가족을 잃은 김구 선생의 마음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난 가족 중 한 명이라도 죽게 되어도 살기 힘들어질 것 같은데, 그 일을 2번이나 겪은 김구 선생은 참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이후, 임시정부는 특별한 행사를 열게 된다. 바로 김구 선생이 19409, ‘한국광복군을 창간하게 된 것이다. 당시, 한국광복군은 우리나라의 많은 조선인들과 임시정부의 희망이 됐을 것이다. 얼마나 기뻤을까? 당시에 없었던 내가 지금 이 사실을 읽고 있는데도 이렇게 가슴이 벅차고 자랑스러운데 말이다. 또한, 그 이후부터 중국이나 해외에서도 우리나라의 임시정부를 인정하게 되었다고 한다. 1941, 일본은 미국의 진주만을 습격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다. 이 시기엔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기거나 아주 어렸을 때였겠지? 그리고, 우리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가 살아계셨을 것이다. 이 시기를 놓치지 않은 김구 선생도 일본에 전쟁을 선포하였다. 그 뒤엔 우리나라의 든든한 광복군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후 일본군에 강제 징병됐던 학생 40여 명이 김구 선생을 찾아왔다. 일본군에서 강제로 싸워야했던 기분이 어땠을까? 정말 화가 치밀어 오르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고, 나였다면 정말 괴롭고 나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생겼을 것 같다. 탈출하신 군인 분들이 얼마나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을지, 현대에 편하게 살고 있는 나로선 상상이 가질 않는다. 그 당시 김구 선생은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점점 희망의 실이 보이기 시작하여 정말 감격스럽고 또, 어린 나이임에도 자원해서 광복군에 투입 된 학생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전쟁에 투입되기 전 광복군이 훈련을 받는 모습을 본 김구 선생은 벅차올랐다고 한다. 당시, 한국광복군과 미군이 힘을 합쳐 생기게 된 부대인 ‘OSS’의 총책임자였던 미국의 도노반은 성조기 아래에 앉고, 김구 선생은 태극기 아래에 앉았는데 정말 나였더라도 가슴이 벅차올랐을 것 같다. 힘든 여건으로 태평양 전쟁 참전 준비를 마친 광복군에겐 전화 한 통이 오게 됐는데, 전화의 내용은 일제가 항복했다는 소식이었다. 참전 한 달 전도 아닌 하루 전에 그런 소식을 받게 된 것이다. 전화를 받은 김구 선생은 그 소식은 희소식이 아니라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소식이었다고 하였다. 수 년 동안 노력한 참전 훈련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듣곤 너무 애가 타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몇 년 동안 준비를 했는데 말이다. 그 몇 년은 광복군에게도, 김구 선생에게도 힘들게 노력한 값진 시간이었다. 그런데 하루 아침 만에 항복이라는 소식은 아주 절망스러웠을 것이다. 환호하는 중국인들을 보는 김구 선생은 만감이 교차하였다 한다. 그 이유는, 참전을 하지 않아 승전국이 아닌 채로 독립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까지도 해결하지 못한 친일파 청산 문제의 계기가 된다. 이 해방은 김구 선생이 그토록 원하던 해방의 모습이 아니었다고 한다. 나 역시, 이렇게 하게 된 해방이 몹시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조선인들 입장에선 하루라도 빨리 해방을 하고 싶었겠지만, 이때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 때문에, 지금까지도 친일파 일가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지 않는가? ‘집안이 친일파면 삼 대가 풍족하고, 집안이 독립운동가면 삼 대가 망한다라고 말이다. 지금도 6.25 유공자들은 대접도 못 받으며 사는 세상인데,  때 우리나라가 승전국이 되었다면, 친일파 청산은 물론이고 독도 문제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크게 낼 수 있게 됐을 것이다. 독립 후 김구 선생은 바로 조선 땅에 가길 원하였지만, 선거를 통해 생긴 임시정부가 아니라는 미국의 입장 때문에 임시정부의 자격으로 귀국하지 못하였고 개인자격으로 귀국하였다. 그러나 도착한 김포공항에는 사람 한 명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얼마나 쓸쓸하였을까, 독립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정작 27년 만에 돌아온 조국에선 반기는 사람 한 명 없으니 말이다. 김구 선생은 경교장으로 향하였고, 그 당시 취재를 하러 온 기자는 이승만은 세련되고 깔끔하게 차려입은 마치 신사 같았는데 김구 선생의 모습은 큰 바윗돌 같았다고 한다. 어휘 또한, 이승만은 고급스러운 말만 쓰는 반면에 김구 선생은 순박하고 알아듣기 쉬운 말로 연설을 하였다고 한다. 정말 존경스러운 분 아닌가? ‘조선인을 사랑하는 마음이 말로도 빠져나오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백성이 알아듣기 힘든 고급지고 세련된 어투보다 조금 투박하더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어투가 1000만 배 백성을 위한 것이다. 이후, 경교장에는 김구 선생을 찾아오는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그에 임시정부의 인기를 체감한 미군정은 김구 선생의 육성 방송을 2분을 허락했다고 한다. 참 웃긴 것이 속히 말해 자기네들이 뭔데 내 나라에서 하는 육성 방송을 허락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하여 우리나라가 독립했다고 우리나라가 미국에 고마워해야하는 건 잘못된 것 같다. 내가 책에서 보았는데, 그 이후부터 우리나라에 친미파가 생겼다고 한다. 친미파나 친일파나 둘 다 문화 사대주의인 것은 똑같다. 자국의 힘으로 독립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본에서 우리나라를 아직까지도 식민지 취급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194511, 김구 선생은 2분 동안 귀국 인사를 전하였다.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 본 결과 김구 선생은 친애하는 동포 여러분, 27년 간이나 꿈에서도 잊지 못하고 있던 조국강산에 발을 디디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나와 나의 각원 일동은 한낮 평민의 자격을 갖고 들어왔습니다. 앞으로 여러분과 접촉할 시간도 많을 것이고 말할 기회도 많겠지요. 오늘은 다만 이곳에 무사히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전합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날 날씨가 쌀쌀했음에도 김구 선생의 귀국을 환영하기 위해 국민 15만 명이 몰렸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조선인을 사랑한 것과 같이 조선인들도 김구 선생을 그리워했음을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너무나 감격스러운 순간이었을 것 같다. 수 십 년 간 독립 운동 때문에 고생하다가, 독립을 하고 와서 조국에서 받는 환호성은, 음식으로 따지자면 고구마 100개를 먹다가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미군정은 그 모습을 보고, 김구 선생은 한 달 전에 미리 도착했던 이승만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라는 것을 느꼈다고 한다. 194512, 모스크바에서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가 열리게 된다. 회의 주제는, ‘한반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이냐였다. 회의에 참석한 나라는 미국, 소련, 영국의 3나라였으며 정작 우리나라는 참석하지 못하였다. 회의 결과는 5년간 신탁통치를 받아야 한다는 결과가 나왔다. 신탁 통치란, 특정 국가가 일정 지역을 대신 통치한다는 의미이다. 말이 안 되는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떻게 식민 지배를 받다가 해방이 되었는데, 다른 나라가 통치를 한다는 결과가 나온 것인가? 그것은 신탁 통치가 아닌 제 2의 식민 지배로 보인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참 힘이 약해 여러 나라에 휨쓸리는 것이 안쓰럽고 자신들만의 이익에 눈이 멀어 다른 나라를 이용하는 선진국들에 화가 난다. 결국 신탁 통치에 분노한 국민들은 반탁 운동을 진행하였다. 김구 선생은 또한, 반탁 운동은 2의 독립운동이라고 칭하였다. 이후 임시정부의 포고령 발표로, 우리나라 경찰들은 물론이고 미군정까지 임시정부의 지휘를 따르겠다고 하였다. 미군정까지 지휘를 따르겠다 하는 소식에 미국 정부는 분노하였고, 이후 김구 선생과 쭉 사이가 좋지 않았다 한다. 1940년 김구 선생은 지역 순례를 시작하였다. 그 중 윤봉길 의사의 생가도 방문을 하였다고 한다. 내 생각에 김구 선생은 지금까지 쭉 윤봉길 의사를 포함한 여러 독립 운동가들을 잊지 못하고 기억하고 있었던 것 같다. 지역 순례와 함께 김구 선생은 윤봉길 의사와 이봉창 의사, 백정기 의사의 유해 공원을 설립하였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독립 운동가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만들어 졌다고 생각된다. 3명의 독립 운동가의 유해가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김구 선생은 엎드려 통곡하였다고 한다. 또한, “세 사람을 보내고 나만이 살아있으면서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니, 3열사에 대하여 부끄럽기 한량없고 회환을 표할 수 없다라는 말을 하였다. 그 당시 심정은 자국의 힘으로 독립할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한 분통함과 애통함이 넘쳤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19475, 2차 미소 공동 위원회가 재기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에 참여시킬 각 사회단체 등을 서로의 이익만 운운하다가 결정하지 못하였고 회의는 결렬되었다. 결국 아무 득이 없다고 생각을 한 미국은 한반도 문제에서 손을 떼게 되었다. 당시, 미국방부가 군사와 안보 면에서 한반도의 중요성이 크지 않다고 평가한 이유였다. 정말 이익만 바라보고 우리 민족을 물질적으로 이용한 미국이 밉다. 끝내, UN으로 넘겨진 한반도 문제는, ·북한 총선거로 이어지게 되었다. ·북한 총선거를 하였다면 정말 다행인 문제였지만, 북한엔 김일성, 남한에선 이승만이라는 권력이 버티고 있었으며, 소련 측에선 총선거를 진행할 시, 인구수가 남한테 비해 훨씬 적은 북 쪽이 불리할 것이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 이유는 러·일 전쟁에서 패배하여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한반도 지배권을 갈취하기 위함이었다. 러시아가 너무나 싫고 벼룩의 간을 떼어먹으려는 격 아닌가? 그때 총선거만 치렀다면, 이렇게 남과 북이 분단되고 문화가 변하고 민족적 사상이 이토록 변하였을까? 난 아니라고 본다. 특히 북한은 폐쇄적인 국가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와의 교류가 다른 나라보다 훨씬 적은데, 어떻게 이 두 나라가 점점 합쳐질 수 있겠나. UN은 다시 가능한 지역, 남한만의 단독 선거를 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김구 선생은 강하게 반발하였다. 그래서 북한의 김일성을 비롯한 여러 지배층들을 만나 설득하였다. 그때 김구 선생은 내 몸은 두 동강이 나도 되지만, 나라가 두 동강이 나는 건 못 보겠다고 의사를 전하였다. 너무 감동적인 말이다. 자신의 몸은 가누지 않으시면서, 나라에 대해선 정말 죽고 못 사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고, 애국정신이 너무 투철하신 분 같다. 개인적으로, ‘김구 선생이 통일 한반도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어야 했는데라는 생각이 들게 되는 명언이다. 그러나, 5월 남한의 단독 정부가 세워지게 되고 9월 북한의 단독정부 또한 세워지게 된다. 여태껏 노력한 김구 선생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미국, 소련 등의 선진국도 잘못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갈라놓은 이승만, 김일성도 문제라고 생각된다. 게다가, 두 인물 모두 독재정권으로 인해, 드디어 해방되어 쉴 수 있게 된 국민들의 피를 말렸으니, 얼마나 사람답지 못한가? ·북한의 단독 정부 수립 이후로, 경교장엔 사람 한 명 없는 적막감만이 맴돌았다고 한다. 정말 모든 것이 빈 것처럼 허무했을 거라는 예상이 든다. 예전처럼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 왜 이렇게 힘들게 고생해야 하는 일인가? 정말 당연히 돼야 할 통일인데, 어째서 당연한 일을 가지고 모두가 고생해야 하는 것인지 싶다. 그때 김구 선생은 눈길을 걸을 땐 발걸음을 어지럽게 걷지 마라. 오늘 나의 발자국은 뒤에 올 사람의 길이 된다.” 라는 명언을 남겼다. 이 명언은 내가 백범 일지를 보기 전에도 알고 있던 유명한 명언이다. 지금 들어도 참 모든 사람이 본받아야 할 명언이라는 생각이 들고, 김구 선생의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돋보인다. 이런 김구 선생의 가치관 덕분에 지금의 대한민국과 대한민국 국민들이 평화롭게 살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는 마음이 든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그 때를 마지막으로 안두희에 의해 4발의 총살을 당하게 된다. 인터넷에 검색을 해본 결과, 안두희가 이승만의 의뢰를 받아 살인을 저지른 것이라는 설이 정말 많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승만은 정말 사람만도 못한 짐승이라고 부를 수 있다. 너무 안타까운 죽음이라는 생각이 든다. 김구 선생이 초대 대통령이 아니었더라도, 우리나라에서 친일파 청산이나 여러 독립 운동가에 대한 지원 등 현재 빈번하게 일어나는 문제들이 해결됐을 것이고 지금보다 통일을 하는 것이 더 수월하였을 텐데 말이다. 김구 선생은 오늘부터 나의 롤모델이 되었다. 원래 알고 있던 사실보다 훨씬 위대하고 존경스러운 분이라고 생각이 되고, 우리 한민족이 잊어선 안 될 분들 중 한 명이라는 생각이 든다. 백범일지를 읽은 계기로 역사가 얼마나 교육에 중요한지와, 왜 반드시 알아야 되는지 등의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 요즘 통일적 여론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는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가족보다 피가 진한 것이 민족이라는 말을 되새길 수 있게 되었다. 전 정권이 있었을 땐 상상조차 못할 일이었고, 그 당시에도 독재 권력을 물리치기 위한 촛불 집회 등의 여러 시위가 일어난 것을 보고 사회에 평화가 찾아오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난 남북정상회담이 1회만 하고 마치게 될 것 같았는데, 곧이어 2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사실에 속히 말해 몸이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된다면 이산가족이 더 오랜 시간을 함께할 수 있겠지만, 여러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견해 차이로 인해 아마 통일을 하는 과정이 순탄할 것 같지만은 않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정말 아무리 오래 걸린다 한들 통일을 위해 힘쓴 여러 위대한 분들의 노력이 헛되이 보이지 않게, 꼭 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아니,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게 맞다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통일을 하면 불편한 점이 많다고 하여 통일을 하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도 있겠지만 말이다. 점점 남북정상회담이나, 우리나라의 아이돌이 이번에 북한에 가서 공연을 한 것처럼 천천히 다급하지 않은 문화 교류를 통해 잘 섞일 수 있었으면 한다. 백범일지는 내 역사적 견해를 순식간에 바꿔놓은 책이기도 하며, 앞으로 사회에 대해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 있게 한 계기가 되었다. 여러 독립 운동가 분들의 노력이 헛되지 않게, 나도 역사적인 사실들을 제대로 인지하고, 북한에 대해 한 민족이라는 생각을 가질 것이다. 내가 이런 평화로운 세상에 살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조국을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고 싸우신 숭고한 분들을 잊지 않고 기억할 것이다. 난 또한 여러 독립운동가가 투옥한 서대문 형무소의 역사관에 꼭 한번 가보고 싶다. 내가 경기도 같은 서울과 가까운 지역에 거주한다면,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이나 다른 역사 기념관, 박물관 등을 자주 찾아갈 수 있을 텐데 서울을 갈 기회가 흔치 않다. , 그 흔치 않은 기회에 부모님이나 다른 가족들에게 역사관을 가고 싶다고 설득하면 잘 보내주지 않는다. 난 우리 가족이 요새 사회나 정치에 대해 아는 것도 좋지만, 역사에 대해 잘 알았으면 좋겠다. 특히나 우리 부모님 세대는 온전히 제대로 된 교육을 받는 것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그걸 알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역사인 한국사에 대해 알려주고 싶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의사소통이라는 말이 있듯이, 전 정권과 같은 사태가 또 일어났을 때 옛 역사를 보고 잘 대응할 수 있는 사회를 원한다. 이승만 전 정권의 장기집권을 ‘4·19 혁명으로 몰아내고, 박근혜 전 정권의 권력남용을 촛불집회로 응징했듯이 말이다. 현재 행동이 미래에는 역사가 되어있겠지? 후손들의 사회에는 권력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외치는 게 당연한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지금도 당연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있지만, 난 그런 사람이 많아졌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권리를 정당하게 인정받았으면 한다. 요새, 뉴스를 보니 남북정상회담과 남북고위급회담 등을 통해 우리나라부터 유럽까지 가는 유라시아 철도 설치를 국제철도기구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받았다고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까지 줄곧 만장일치였지만, 북한 측에서 항상 반대 의사를 내비쳐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번엔 북한 측에서도 찬성하여, 국제철도협력기구인 ‘OSJD’에 우리나라도 정회원으로 가입하였다. 그 말은 즉, 북한의 금강산 등의 관광지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이다. 대화를 하면 이렇게 쉬운 일을, 왜 지금에서야 실현했는지가 너무 아쉽다. 중학교 시절 진로 시간에 카드 속 인물 중 내 롤모델을 찾는 시간을 잠깐 가졌는데 그 카드에도 김구 선생이 있었다. 그땐, 독립운동가, 우리나라를 위해 힘쓰신 분으로만 알고 있어서 김구 선생 카드를 선택했다. 그러나 지금 김구 선생 카드를 발견했다면, 민족의 지도자, 영웅 등의 이유를 들어 김구 선생을 롤모델로 삼을 것 이다. 백범 일지를 읽음으로써 내 롤모델에 대한 생각과 그에 따른 내 삶의 가치관이 달라졌다. 이렇게 훌륭한 서적을 남겨준 김구 선생에 너무나도 감사한 마음이 들고, 이를 계기로 내 나라 역사에 대해 좀 더 알아가고 사회적 공동체 의식을 더 추구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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