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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일지 독서감상문쓰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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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작 소개

수상작 소개 상세내용
제목 백범 김구 : 민족의 상징
작성자 정나라(보은정보고) 개최일 2017-06-19 조회 238

백범 김구 : 민족의 상징

 

보은정보고등학교

3학년 2반 정나라

 

문득, 우리나라의 초대 대통령이 김구 선생이었으면 우리나라의 통일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이 자신에게 소원이 뭐냐고 묻는다면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자주적인 독립 이라고 말씀하셨던 김구 선생이라면, 우리나라는 분단이 안 되었을까? 감히 내가 결론을 내려 보자면, 아닐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우리민족의 분단을 원했겠는가. 김구 선생의 자주적인 독립을 하기에는 우린 힘이 없었고, 강대국들의 힘은 너무 강해 그들의 결정을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제 강점기와 그 후 독립까지의 내용을 국사를 통해 배우며, 난 그 당시의 백성이 된 양 무기력해졌다. 우리의 독립 움직임에 하나하나 잔인하게 탄압하는 일본에 화가 났지만, 우리가 독립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어보였다. 하지만 일본이 아무리 탄압해도 우리민족은 독립운동과 저항이 끊이지 않았고, 그것에 난 감동했다. 어떻게 그런 심한 탄압 와중에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 하나로만 다시 일어날 힘이 생겼는지 놀라웠고, 과연 나라면 지금 내가 살아가는 나라를 위해 그런 노력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하니 독립운동가 분들께 너무 감사해졌다. 이런 와중에 백범일지를 읽었고, 국사 시험점수를 높이기 위해 공부하던 국사가 아닌 한 사람의 독립운동가의 일생을 보게 되었다.

결과와 외면만 보던 역사를 한 사람을 기준으로 그 시대 속에 들어간 것처럼 그 당시 사회를 보게 되었고, 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위대할 것만 같았던 백범 김구 선생의 일대기의 첫 페이지는 그저 창암(昌巖)’이라는 아명을 가진 어린 아이였다.

김구 선생님의 4개의 이름 중 첫 번째인 창암은 큰 바위와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면서 부모님께서 지어주신 이름이다. 그의 집안은 양반 집안이었긴 하지만 조상이 큰 죄를 지어 숨어 다녀야 하는 상황 이었다. 어린 시절, 어려운 환경에서 열심히 공부해 경과 과거에 응시하지만 낙방하고 매관매직의 타락성을 본 창암은 관상공부를 시작한다. 관상을 공부하는 방법은 자신의 얼굴을 보며 공부하고 다른 이의 얼굴에 적용해 보는 것이었는데, 그의 관상은 타고난 복은 없었지만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 라는 구절을 보곤 관상 좋은 사람보다는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 인생을 개척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졌다.

 

그 후로 내가 생각하기에 백범 김구 선생의 삶에서 가장 큰 분기점이라고 생각되는 동학에 입도 한 후 이름을 창수(昌洙)’로 개명한다. 입도 몇 달 후 연비가 수천 명이 되어 아기 접주라고 불리던 그는 이듬해 가을, 지금 내 나이가 된 김구 선생은 내가 현재 살고 있는 보은으로 오셔서 접주 첩지를 받는다. 100년 전 김구 선생님의 독립운동가로서의 첫 시작이 이곳 보은이고, 나와 같았던 19살이라는 것에 마음이 벅찼다. 하지만 독립운동가의 첫 시작과 함께 당시 창수에게 찾아온 것은 처음 겪어 보는 배신이었다. 동학 내 김구의 세력이 급격히 커지는 것을 견제하던 같은 동학군이 그의 포수부대를 공격하자 창수는 피신을 가 잠적하였고 그의 부대를 접수하려던 반대세력은 그의 최측근을 잡아 죽인다.

결론적으론 동학은 실패했고, 그 후 후조 고능선을 만나 그의 가르침을 받는다. 그는 청나라와 손잡고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며 청나라로 갈 것을 권하였다. 1895108, 일본군과 훈련대가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그는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치하포에서 일본군 장교 스치다를 죽인다. 잡히면 목숨을 잃을게 뻔한 상황이었지만 창수는 백성들이 나라의 혼란을 깨닫고 행동할 수 있다면 죽어도 한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며 도망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의 거처를 적은 포고문을 길거리에 붙이곤 체포가 되길 기다린다. 그가 체포된 후에 그의 의도대로 이 일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고, 사형을 선고받지만 미결수로 감옥 생활을 시작하며 서양 근대문물을 접한다. 그리고 2년 후 그가 23살이 되던 해에 탈옥을 하고 그 해 늦가을 절에 들어가 중이 되어 숨어 살다 다음 해에 금강산으로 공부하러 간다고 하곤 절을 떠난다.

 

다시 도피생활을 시작한 그는 일본의 호적에서 벗어날 목적으로 이름을 ()’로 고친다. 부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얼마 후 결혼을 약속했던 사람까지 병사하게 된다. 이런 절망적인 날들이 지나고 다시 일어난 김구 선생이 학교를 설립해 활동하던 중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사건이 일어나 독립운동이 불타오르는 듯 했다. 하지만 다음해 우리는 국권을 피탈 당했고, 김구 선생은 체포된다. 유치장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징역15년을 선고 받지만 일왕이 죽어 7년으로, 일왕의 처가 죽어 5년으로 감형 받는다. 이때 김구는 이름은 구()를 구(), 백정이나 범부라도 애국심이 다 자신과 같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백범(白凡)’이라는 호를 붙인다.

 

백범은 백정의 백과 보통사람이라는 뜻의 범이다. 나라 전체에서 가장 낮은 사람이 되겠다고 붙인 호 인데, 백범 김구 선생님은 백범일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호를 백범으로 고친 것은 감옥에서 여러 해 연구에 의해 우리나라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현재의 나 정도는 되어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바람 때문이었다." 이후 김구 선생은 백성들의 계몽을 위해 노력하다 상해로 망명한다. 그 후 상해 임시정부에서 활동을 하다 많은 어려움과 희생을 통해 정부의 대표가 되고, 국외에서 독립운동을 지원한다. 또한 많은 젊은 독립운동가들을 이끌었는데, 그들 또한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셨다. 이런 분들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자주적인 독립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을 미워할 수 있게 되었으며 자주성을 잃지 않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임시정부를 이끌면서 김구 선생은 두 아들을 생각하며 자신의 일대기를 기록하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바로 백범일지이다. 일본에선 백범 김구와 임시정부를 찾기 위해 온 중국 땅을 다 들 쑤시고 다녔지만, 김구 선생은 군사학교를 세우는 등 많은 노력을 하셨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에도 우리나라 백성들은 분단이 되어가고, 이 시기에 일본이 항복을 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독립이 된 우리나라는 완전한 독립이 아닌 지배의 상대가 일본에서 소련과 미국으로 넘어간 것일 뿐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가 꿈꾸던 독립이 아니었다. 완전한 독립도 아닐뿐더러 우리나라가 두 개로 분열이 되자 여태까지의 김구 선생의 노력은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이다. 그래도 김구 선생과 임시정부는 포기하지 않고 귀국하려 했으나 미국과 소련은 이미 따로따로 정부를 수립했기 때문에 통일을 하려 하는 임시정부의 귀국을 막았다.

일흔이 넘은 백범 김구 선생은 드디어 귀국을 했지만 나라가 갈라진 것에 괴로워하고 재결합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노력들은 강대국들과 우리나라의 지도층으로 인해 모든 일은 실패하고 또 실패 한다. 그럼에도 그는 포기 하지 않았다. 모두가 갈라져 있을 때, 김구 선생만이 통일을 외쳤지만 이 모든 일의 대가는 죽음뿐 이었다.

 

김구 선생이 돌아가시고 남은 우리나라는 분단이 됐고, 같은 민족을 가족을 친구를 배신하고, 배척하고, 죽였다. 통일을 미룬 그 결과 당시 잠시 이별 하는 줄 알았던 가족들은 지금까지 만나지 못하고 늙었고, 우리나란 지금까지 분열되어 종전이 아닌 휴전상태다.

우리나라는 결국 김구 선생이 생각하는 아름다운 나라는 되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마음 좋은 사람이 되었다. 그는 큰 바위, ‘백범으로, ‘마음 좋은 사람으로 살다가 가셨다. 백범 김구 선생은 한 나라, 완전한 자주 독립을 꿈꿔 오셨고, 우리도 그와 같은 꿈을 꿔야 통일이 가까워져 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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